미쓰비시(Mitsubishi)가 대만 폭스콘 계열사와 협업해 만든 신형 전기 SUV를 호주 시장에 투입한다. 차명은 ASX VR-e로, 미쓰비시가 2026년 4분기 호주와 뉴질랜드 시장에 순차 출시할 예정이다.
미쓰비시는 최근 몇 년간 세계 각지에서 저가 크로스오버와 SUV, 픽업트럭 위주로 라인업을 꾸려왔다. 신차 상당수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파트너사의 차량을 손봐 내놓는 방식이었다. 최신 아웃랜더(Outlander)처럼 공을 들인 사례가 있는 반면, 최근 공개한 이클립스 스포트백 EV는 닛산 리프를 살짝 손질한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ASX VR-e는 닛산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기반 차량은 대만 폭스트론(Foxtron)이 만든 브리아(Bria)다. 폭스트론은 대만 완성차 업체 위룽(Yulon)과 아이폰 제조사로 잘 알려진 폭스콘(Foxconn)이 손잡고 만든 합작 브랜드다. 차체 디자인은 이탈리아 명문 디자인 하우스 피닌파리나가 맡았다.

폭스콘, 닛산 대신 미쓰비시 선택
폭스콘은 앞서 닛산과 협력을 타진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미쓰비시가 2025년 폭스콘 측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물꼬를 텄고, 그 결과물이 이번 ASX VR-e다. 브리아는 2025년 12월 대만에서 처음 공개된 차량으로, 폭스트론이 내놓은 첫 글로벌 시장 겨냥 전기차로 소개됐다.
차체 크기는 전장 4315mm, 전폭 1885mm, 전고 1535mm에 휠베이스 2800mm로, 마쓰다 CX-30과 비슷한 체급이다. 미쓰비시는 브리아 원형에 브랜드 고유의 배지와 휠 디자인, 프런트 그릴 레터링을 더해 차별화를 시도했다. 실내는 스티어링 휠 로고를 제외하면 브리아와 거의 동일하다. 공력 성능을 위해 범퍼 중앙 공기를 보닛 위로 흘려보내는 S덕트와 주행 상황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능동형 그릴 셔터도 탑재했다.

호주 시장에는 LS, 어스파이어(Aspire), 익시드(Exceed), GSR 등 네 개 트림으로 판매된다. 미쓰비시는 아직 호주향 배터리 용량과 주행거리, 충전 속도, 가격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대만 브리아 사양을 참고하면 대략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브리아 기본형과 중간 트림은 171kW(232마력) 후륜 모터와 57.7kWh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조합해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6.8초에 도달하고, NEDC 기준 516km를 주행한다. 최상위 트림 파이오니어(Pioneer)는 전후 듀얼 모터로 4륜구동을 구현해 합산 출력 298kW(406마력)를 낸다. 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3.9초로 줄어든다.
VR-e, 갤랑 VR-4 향한 오마주

VR-e라는 이름은 미쓰비시가 랠리에서 명성을 쌓았던 갤랑(Galant) VR-4를 겨냥한 작명이다. 갤랑 VR-4는 랜서 에볼루션이 등장하기 전 미쓰비시의 4륜구동 터보 세단 계보를 대표하던 모델이다. ASX라는 차명 자체는 ‘액티브 스포츠 크로스오버(Active Sports Crossover)’의 줄임말로, 말레이시아 등 일부 시장에서 이미 쓰인 바 있다.

호주에서 이 차가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미쓰비시가 2012년까지 판매했던 i-미브(i-MiEV) 이후 처음 내놓는 순수전기차이기 때문이다. i-미브는 호주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로 꼽히는 모델이지만, 이후 미쓰비시는 토요타 등 경쟁 일본 브랜드에 비해 전동화 대응이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폭스트론, 미국 진출은 일단 보류
폭스트론은 오랫동안 미국 시장 진출을 공언해왔다. 제너럴모터스(GM)가 쓰던 오하이오주 로즈타운 공장까지 인수했지만, 3년 가까이 실제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난 6월에는 관세 부담을 이유로 미국 전기차 출시 계획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ASX VR-e가 미국 시장에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당분간 낮아 보인다.
호주 전기차 시장에서 ASX VR-e가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중국계 브랜드들이 이미 여러 차종을 앞세워 호주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데다, 폭스트론 브랜드는 지금까지 대만 밖에서 대규모 판매 실적을 낸 적이 없다. 미쓰비시와 폭스트론 모두 이번 협업의 성패를 가늠할 첫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