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가 경차급 전기차를 2027년 초 유럽에 수출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8월 4일 보도한 내용으로, 유럽 완성차와 중국 업체를 동시에 겨냥한 승부수다. 이 차는 오는 11월 일본 내수용으로 먼저 출시하는 ‘비전 e-스카이(Vision e-Sky)’를 기반으로 하며, 스즈키가 1995년 카푸치노 단종 이후 경차 세그먼트를 거의 그대로 해외에 내보내는 첫 사례다.

수출용 모델은 시즈오카 공장에서 생산하고, 영국과 이탈리아를 우선 검토 시장으로 꼽는다. 영국은 과거 카푸치노가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장이었지만 이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EU가 만든 소형 EV 규격, 스즈키는 정작 혜택 밖
규제 환경도 스즈키의 일정을 밀어붙이는 요인이다. EU는 2025년 일본 경차 제도를 참고해 소형 전기차 전용 분류 체계를 신설하고, 역내에서 생산하는 소형 EV에 보조금과 규제 완화 혜택을 주기로 했다. 다만 이 분류의 전장 상한은 4.2m로 실제 경차 규격보다 크고, 스즈키 e-스카이는 EU 역내 생산이 아니어서 취지에는 맞지만 구체적인 혜택 대상에서는 빠질 가능성이 높다.
스즈키로서는 시급한 사정도 있다. 올해 1분기 유럽 판매량이 18만7,000대로 전년 대비 15% 줄었다. 저가 대중형 전기차로 이 흐름을 되돌리는 동시에 동남아 등 다른 소형차 시장 확장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계산이다. 기술적으로도 노리는 지점이 명확하다. 장거리 전기차에 필요한 대용량 배터리 대신 20kWh 안팎의 소형 배터리로도 차체를 가볍게, 가격을 낮게 만들면서 일상 사용성은 지키겠다는 전략이다. 닛산의 일본 내수 경차 전기차 사쿠라가 이미 국내 시장에서 증명한 방식이다.
EU 전기차 시장, 올 상반기 35% 급성장
이 차가 뛰어드는 시장 자체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 집계로 올해 상반기 EU 순수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35% 늘었고, 신차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까지 올라갔다. 플러그인하이브리드를 더한 ‘플러그 달린 차’는 전체 판매의 3분의 1을 넘었고, 마일드하이브리드까지 포함하면 3분의 2를 넘는다. 르노와 폭스바겐도 EU의 신규 소형 EV 분류를 겨냥한 모델을 각각 발표했고, BYD와 리프모터도 별도로 유럽 점유율을 넓히는 중이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구조적 변화가 자리한다. 경차 형태의 초소형차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세계 시장에서 통할 조건을 갖췄다는 평가다. 배기량 제한 탓에 일본 밀집 도로 밖에서는 굼뜨게 느껴졌던 내연기관의 약점을, 대용량 배터리 없이도 도심 주행에 충분한 즉각적인 토크를 내는 전기모터가 해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구 완성차 업체들의 저가 소형 해치백 라인업이 사실상 사라지고 신차 평균 가격이 계속 오르면서, 규제 당국과 소비자 모두 경차 같은 소형·저가 포맷 쪽으로 떠밀리고 있다.
정작 이 틈을 가장 잘 파고들 회사는 일본차가 아니다
공교롭게도 이 기회를 가장 유리하게 활용할 회사는 일본 업체가 아니라 중국 BYD로 꼽힌다. 일본 경차 규정에 맞춰 개발한 BYD 라코(Racco)는 서류상으로는 BYD 최초의 시장 전용 모델이지만, 처음부터 일본 내수만 염두에 둔 차는 아니었다. BYD 스텔라 리 수석부사장은 “EU 규정을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고, 여지가 있다면 그 차를 유럽에 들여올 수 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수입 라코의 예상 가격은 1만5,000유로 미만으로, 스즈키 유럽 판매가를 밑돌 가능성이 크고 BYD 기존 라인업인 돌핀 서프보다도 아래에 위치하는 초저가 모델이 된다.
BYD의 원가 경쟁력은 이번에는 더 넘기 어려운 장벽으로 꼽힌다. 라코는 이미 BYD 자체 LFP 배터리를 쓰고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차 규격에 맞춘 우핸들 인증 덕분에 좌핸들용 엔지니어링을 마치기 전에도 영국을 비롯한 우핸들 시장에 먼저 진입할 수 있는 경로까지 확보했다. 결국 스즈키의 승부수는 BYD의 원가 구조보다 ‘경차라는 이름값을 앞세워 유럽에 먼저 도착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도박이다. 그 답은 BYD가 라코의 좌핸들 버전을 마무리하기 훨씬 전에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